사용자 삽입 이미지
특별히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가 지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신념은 "푸가의 기법"은 반드시 오르간으로 연주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쪽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다 - 첫 번째, 바흐는 당대 최고 수준의 오르간 연주자였다는 점. 두 번째, 그의 필생의 업적인 대위법 연구의 정수를 구조적으로 완전히 구현해낼 수 있는 최적의 악기가 오르간이라는 점. 세 번째, 바흐 하면 오르간 음향부터 떠오르는게 일반적이라는 점.

이상의 이유들에 비하면, "푸가의 기법"을 오르간으로 연주할 경우 매일 듣고 즐기기엔 상당히 무겁고 지루한 느낌을 주는게 사실이라는 단점은 매우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이나 바흐 자신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과는 달리, "푸가의 기법"은 매일 들을 성질의 것은 분명히 아니니까.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흐 "푸가의 기법" 外 - 헬무트 발햐(1956): 오르간으로 연주한 바흐, 라고 하면 첫 순위에 꼽아야 할 연주자가 바로 발햐이다. 시력을 잃은 후에 오로지 바흐 건반 작품들의 연구에만 매달려서 그 많은 작품들을 죄다 외워버렸다는 감동적인 일화의 도움이 없어도, 그의 연주는 그 자체로 훌륭하고 위대하다. 원전 연주의 시대를 거친 오늘날의 관점에선 때때로 매우 무겁고, 느리고, 딱딱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그런 '옛날 연주' 만이 줄 수 있는 위엄과 구조미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무척이나 감명깊게 다가온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흐 "푸가의 기법" - 헤르베르트 타헤치(1977): "푸가의 기법" 오르간 연주에 있어서 예로부터 인정받아온 음반이다. 한창 선풍을 일으키던 원전 연주 풍조에 영향을 받아 연주되어, 전반적으로 조금 빠른 템포에 적절한 잔향이 남아 있는 음색이 매력적.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 음반에는 미완성 대 푸가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내지에 수록된 해설에서 타헤치는 레온하르트 등이 지지하는 당대의 일부 유력설에 기초한 판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한참 진행되던 선율이 갑작스레 뚝 끊어질 때의 그 잊을 수 없는 느낌을 원하는 애호가에겐 아쉽기 그지 없는 부분이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흐 "푸가의 기법" - 앙드레 이조와르(1982): 오르간으로 연주된 "푸가의 기법"을 찾아 헤매다가 몇몇 사람들이 호평한 것을 보고 애타게 구했던, 나름 희귀 음반. 프랑스 오르간 연주계의 명인 앙드레 이조와르가 프랑스에 있는 고색창연한 옛 오르간으로 연주하였다. 게르만 계열 오르간 연주인 위의 두 연주들과 비교해볼 때, 매우 빠르고 낭만적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연주자 본인이 무슨 심보에선지 곡의 배열 순서를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대칭적인 구조에 따라 마구 뒤섞어 놨다는 점이 옥의 티. 미완성 대 푸가가 중간에 떡 하니 들어있는 그 난감함이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A.J.H

2008/06/08 00:52 2008/06/08 00:52

User inserted image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으로 시끌벅적했던 올해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았고 널리 인구에 회자된 음악가를 한 사람 들라면 단연 아르농쿠르입니다. 50년 전, 모차르트라면 당연히 '아름답고 행복하게' 연주하여야만 하는 줄 알았던 시절에, "과연 이렇게 연주하는 게 옳은 일일까"라는 과감한 화두를 붙잡은 채 기존의 필하모닉 스타일의 연주와는 상반되는 길을 탐구해왔던 그는, 온갖 역경과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마침내 "모차르트의 사도"라고 칭송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올해 1월에 짤츠부르크에서 있었던 모차르트 탄생일 기념식전에서 기념사를 낭독한 아르농쿠르가 느꼈을 감회는 분명히 동료 음악가들을 포함한 다른 이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겠지요.

아르농쿠르의 음악 인생 중 가장 큰 격랑의 시기는 뭐니뭐니해도 20여년 전, 로얄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연주하고 녹음하던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원전 연주와 현대식 필하모니 연주를 혼합한 절충주의 스타일을 탐구하던 그 때, 아르농쿠르가 내놓는 음반들에 담긴 광포하고 원색적인 음색은 전통적인 모차르트 해석에 익숙해져있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주었습니다. 일전에 리뷰했던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41번 음반은 그러한 "논란거리"의 대표적인 사례였지요. "후련하다, 통쾌하다, 경이롭다"라는 칭송과 "변태적이다, 괴상하다, 졸렬하다"라는 비판이 격렬히 오갔던 그 때의 산물들 중 하나가 바로 이 "돈 조반니"입니다.

트럼펫, 그것도 현대식이 아니라 과거의 내추럴 트럼펫을 비롯한 관악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20년 전의 아르농쿠르의 모차르트 해석법은 지금 들어도 무척 인상적인 음색을 자아냅니다. 마치 19세기 말, 원색적인 색채와 노골적인 화법을 사용하여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었던 화풍의 그림들을 보았을 때와 유사한 그런 느낌을 받게 합니다. "돈 조반니" 같은 오페라에서도 아르농쿠르는 이러한 자신만의 화법(?)을 가차없이 적용합니다. 서주의 첫 음절에서부터 울려퍼지는 강렬하고도 묵직한 합주의 일대 타격, 약간 느린 편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곳곳에서 경쾌함과 활발함을 선사하기 위한 작위적인 변경이 이루어지는 템포 설정,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가 현대식 필하모닉 스타일의 연주단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의외라고 해야 할 쨍쨍거리는 원전 연주 풍의 악기음 등등이 어우러진 효과가 그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러한 아르농쿠르의 해석은 지금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될 소지가 큽니다. 그리고 때로는, 결과물의 측면에서 그러한 문제의 소지가 불거져 나와 단점들을 노출시키기도 합니다. "돈 조반니"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좋게 말하면 절묘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중간한 템포 설정인데, 후반부 특히 2막 클라이맥스의 - 모두가 고대하는 - 석상 등장 장면은 그 전까지의 분위기와 비교해볼 때 약간 지나치게 빨라진 템포로 진행되는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리고 초반에는 감상자에게 놀라운 충격을 가져다주던 '야수파' 풍의 연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무덤덤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한번 기존의 역치값을 넘긴 자극은 역치값을 넘긴 그 순간보다는 그 체감 강도가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이처럼 하얀 식탁보의 가장자리에 슬쩍 검은 얼룩이 묻어있는 듯한 결점이 군데 군데 눈에 띄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르농쿠르의 과감한 도전이 잘 선정된 양질의 성악가들 - 햄슨, 그루베로바, 바바라 보니 등 - 의 균형잡힌 가창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만족스러운 "돈 조반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영화 "아마데우스"의 영향으로 ""돈 조반니" 하면 석상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부족한 느낌이 들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석상이 등장하는 바로 그 순간의 음색은 생각보다는 광포하지도 않고 묵시록적인 장엄함 같은 것도 조금 느끼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나이드신 애호가분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빛나는 칼 뵘의 1977년도 "돈 조반니" 쪽이 되려 우위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하기에는 좀 이릅니다. 비교적 절제한 음색으로 시작되는 석상 장면은 뒤로 가면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돈 조반니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장면에 이르면 그야말로 눈사태처럼 격렬해진, 모두가 기대하는 바로 그 음향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의 해석과 묘사에서는 뵘 보다는 아르농쿠르 쪽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A.J.H

2006/12/13 00:14 2006/12/13 00:14


블로그 이미지

행복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 언제쯤?

- A.J.H

Calendar

«   2008/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408533
Today:
227
Yesterday: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