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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참 많고 많은 브람스 교향곡 전집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자연스럽게 먼저 손이 가게 되는 음반은 단연코 뵘과 빈필의 70년대 녹음이다. CD 재발매에도 불구하고 별로 나아지지 않은 리마스터링 상태가 옥의 티이지만, 음질 상의 아쉬움을 잠시 접어둔다면 높은 하늘 아래 낙엽지고 소슬한 바람이 불며오는 정경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음반이기 때문이다.

뵘과 베를린 필의 1959년도 브람스 1번 교향곡 연주가 이 전집에 수록된 동곡 연주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진국이 우러나온다고 할만 한 연주는 오히려 빈 필 쪽인 듯 하다. 59년도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것은 가을의 정경이라기보다는 늦여름의 열기와 같은 장년의 브람스의 패기이다. '가을의 브람스'는  더 여유롭고 풍성한 음향과 해석을 들려주는 70년대 전집 쪽이 한층 납득이 가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 위 문단에서는 1번 교향곡에 국한하여 살펴보았지만 사실 '좀 더 여유있고 풍성하게'라는 수식어는 뵘의 70년대 브람스 교향곡 전집 전체를 관통하는 해석 상의 핵심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한가을 오후에 낙엽이 가득한 숲 속을 거닐 때 느낄 수 있는 원목의 향기에 비견할만한 풍미가 잔잔하게 느껴진다. 다른 지휘자들도 제각각의 풍미를 띄는 브람스를 들려주고 있지만,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에 걸맞는 품격과 원숙함 그리고 지휘자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겸양은 뵘 만의 것이다.

이 음반을 '맛깔난다'라고 평가하기는 무리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처음 접하면 되려 매우 심심하고 평범한,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무덤덤함이 부각되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최근에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가지 나물을 정말 맛있다고 느끼며 먹게 되었다. 뵘의 70년대 브람스 전집은 바로 그 가지 나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처음 접할 때는 수수하고 약한 인상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은은한 풍미가 느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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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5 15:06 2008/10/0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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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이 남긴 여러 개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중, 국내에서 특히 평가가 좋은 편인 70년대 전집을 최근 들어보았다. 카라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가오는 9월에 재발매될 연주이나, 현재까지 알고 있는 바로는 새로 나올 음반은 딱히 음질 면에서 향상되었다는 말도 없고 가격은 예전 발매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 로컬로 출시된 DG Eloquence의 염가반을 구매하였다.

교향곡 전곡과 "코리올란", "레오노레", "에그몬트" 등 여러 서곡들이 포함된 총 6장의 구성으로 교향곡 전곡만 수록하여 5장으로 편성하는 전형적인 베토벤 전곡반 구성보다 한 장이 더 많다. 하지만 정작 실제 체감한 바로는, 5장짜리 구성의 타 지휘자들의 음반보다 되려 감상에 걸린 시간이 짧았다. CD 수가 한 장 더 많고 여러 서곡들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뭘까.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조합은 듣는 이로 하여금 딱 한가지 만큼은 확실히 보장한다. 그것은 바로 극상에 달한 오케스트라의 기능미이다. 순수하게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해볼 때 카라얀은 '완벽'하다. 그의 방대한 음반 작업의 결과물들을 통털어 평균적으로 바라볼 때, 분명 그는 동시대의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연주에 있어서 실수나 착오를 일으키는 일이 적다. 아니, 거의 없다.

그러나 그 뿐이다. 카라얀의 대다수 관현악 녹음들은 단지 잘 만들어진 "레디메이드" 상품으로서의 가치 이상을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 음반들과 오페라 음반들은 조금 다른 평가를 내려줄 수 있겠지만, 70년대의 이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그런 예외적인 사례에는 들지 못한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피아니시모, 완벽한 박자감각, 혼연일치하는 현의 놀림, 거기에 최고조에 달한 70년대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더해졌지만, 그러한 미덕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 전집은 자동차로 치면 "쾌적한 승차감"을 제공하는데서 그치는 것이다.

푸르트벵글러의 영감어린 연주, 가디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재발견의 신고전성에 비하면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상대적으로 매력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 별로 큰 감흥을 주지 못한 채 쌩쌩 지나가 버린 것이리라. 새로이 베토벤 교향곡의 세계에 진입하려고 하는 초심자들에게는 이 음반이 매우 훌륭한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심하게 저평가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곁에 가까이 두고 자주 들을만큼 아끼고 사랑하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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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9 12:53 2008/08/0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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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뵘과 빈 필하모닉의 70년대 베토벤 교향곡 스튜디오 전집. 도대체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걸까. 위 사진은 지난 2004년에 한국에 반짝 수입되었던 이탈리아 유니버셜의 로컬반. 이것도 이제 폐반이 되어 더이상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현재로선 프랑스 DG에서 발매한 DG Double 로컬반들로만 이 연주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음질에 대해서 약간 얘기가 있는 것 같아 구매할 마음이 잘 안 든다. 뵘과 빈 필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프랑스 DG, 일본 유니버셜, 이탈리아 유니버셜 이렇게 세 곳에서 각각 로컬반으로만 발매되었는데, 개중에는 이탈리아의 것이 가장 음질이 좋다는게 세간의 평이다.

언젠가는 본사에서 발매하겠지 싶어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솔직히 슬슬 한계다. 이탈리아 유니버셜의 전집을 노려볼까 했는데 폐반되었다고 하니 중고로도 구하기가 힘들 것 같고, 프랑스 로컬반의 음질 문제에 대해 좀더 알아본 다음 최종 결정을 내려봐야 겠다.

DG 본사는 왜 이다지도 뵘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저평가하는 걸까? 카라얀의 베토벤 CD 전집은 자그마치 3종이나 있으면서, 정작 아직도 세계적으로 수많은 팬들이 엄연히 건재한 뵘의 전집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무슨 이유로? OIBP따윈 바라지도 않으니 콜렉터스 에디션으로라도 좀 내줬으면 좋겠다. DG 본사에 항의성 질문 메일이라도 보내야 할까보다.

ps: 이탈리아 로컬반 중고 파실 분 혹시 없나요? 상태가 A급이면 구매 당시의 가격을 그대로 드리고서라도 꼭 사고 싶습니다. 의향 있으신 분은 이 포스팅의 답글 혹은 방명록이나 메일 Keffenhiller@gmail.com 으로 연락 주십시오.
ps2: 혹 프랑스 DG Double 시리즈 로컬반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시면 음질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상세히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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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7 11:06 2008/07/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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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동영상부터 하나 틀고 글을 시작할까 한다.

작년 BBC 프롬에서의 실황인 위 영상을 본 후, 정말로 간만에 같은 영상을 몇번씩 보고 또 보는 짓을 하였다. 그만큼 보는 이를 들뜨고 흥분하게 만드는, 열정에 가득찬 연주였기 때문이다. 가장 촉망받는 차세대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그의 충실한 수족,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는 최근 음악에 말 그대로 '물려' 있던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사실 두다멜은 내가 선호하는 지휘자는 결코 아니다. 그가 DG와 계약한 후에 베토벤 교향곡 5, 7번이나 말러 교향곡 5번을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하긴 했지만, 그 음반들을 굳이 사 듣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열정적인 해석과 연주는 두다멜과 그의 오케스트라에 대해 대표적으로 내려지는 평가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승부하기엔 부족하다, 왜냐면 베토벤과 말러는 조금 더 깊은 경지를 요구하니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다멜과 그의 오케스트라는 아직 좀 더 숙성될 필요가 있는 막 담근 술처럼 보였다.

그러던 차에 접한 위의 실황은 큰 만족감을 주었다. 내가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에게 원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설픈 '거장' 흉내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를 배경으로 자기들만의 색채를 가득 채워 돋보이는 개성과 열정으로 관객들을 매료시키는, 그런 기획과 연주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음반은 나의 그러한 바램을 완전히 충족시켜준다.

이름도 생소한 남미 작곡가들의 관현악에서 느껴지는 이국의 풍미. 그리고 그것을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표현하는 젊은 남미인들의 열정. 이 두 가지는 정말 성공적인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각국의 오케스트라들이 상향 평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예전에는 존재했다는 소위 '지방색'이 거의 사라지다시피하였는데, 두다멜과 그의 악단은 이 음반을 통해서 남미인들 특유의 음악적 풍토를 이방인들에게 매우 매혹적으로 과시하는데 성공하였다.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절대로 이렇게 흥분되는 연주를 들려주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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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2 13:51 2008/06/2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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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녹음한 각종의 연주들은 음질 면에서나 해석 면에서나 모두 현재의 대세와는 정반대에 있다. 디지탈 스테레오 기술이 제공하는 선명하고 깨끗한 음질, 그리고 '작곡가의 창작 의도에 시대적, 합목적적으로 부합하려는' 정격연주 스타일에 익숙해진 오늘날의 감상자들에게 열악한 음질과 제멋대로에 가까워 보이는 해석으로 이루어진 푸르트벵글러의 녹음들은 극히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의 녹음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녹음된 연주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역사상 최악의 독재 정권인 나치 독일 치하에서, 거기에 더해 전쟁 중이라는 극한의 상황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위대한 예술가가 음악이라는 수단을 통해 표출해낸 자신의 시대적 감정들은 그로부터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전시 녹음들에서 일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전 부분에 걸쳐 팽배하게 유지되는 긴장감과 깊디 깊은 심연과도 같은 어두움의 분위기이다. 1944년 12월 19~20일에 녹음된 베토벤 교향곡 제 3번 2악장, 1943년 6월 30일의 베토벤 코리올란 서곡 등의 유명한 전시 녹음들은 그와 같은 느낌들을 특히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유독 전시 녹음에 이러한 특유한 느낌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의 해답은 지휘자 본인이 이 시기에 겪고 있었던 외적, 내적 갈등에 기인한 절망과 고뇌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9세기 말의 교양있는 시민층에 속해있던 푸르트벵글러는 선천적으로 나치라는 존재 그 자체에 완전히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독일 음악 예술을 대표하는 존재로 자타가 공인하던 그 자신의 위치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자부심 그리고 사명감은 그로 하여금 발터나 클렘페러 등의 다른 음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망명의 길을 택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유일하게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과 정치는 별개" 라는 그 자신의 신념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신념은 가혹한 환경 속에 놓인 연약한 관상 식물이나 다름없었다. 나치를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독일을 등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예술과 정치가 전혀 다른 영역에 위치한다고 믿는 것은 자신의 색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소극적이고 현실에 안주하기에 급급한 중산층의 정치적 변명에 불과했다. 푸르트벵글러는 "회색인"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회색인의 운명은 양 극단에 자리잡은 자들에게 휘둘리고 이용당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나락에 떨어진 예술가의 절망과 고뇌가 전시 녹음들에 한가득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우리들이 "회색인" 푸르트벵글러의 우유부단함과 그로 인한 잘못된 선택을 비판하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우리들 대부분도 푸르트벵글러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 십상일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가장 가혹한 시대 환경 속에서 택한 너무나도 평범하지만 눈물겨운 선택과 그것이 낳게 된 비극적인 결과가 평범한 사람들 모두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안타까움의 무의식적 공감대, 그것이 푸르트벵글러의 전시 녹음들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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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교향곡 제 3번 Etc. - 푸르트벵글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44.12.19~20.(Archipel):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리품으로서 소련 모스크바 방송국에 보관되었던 푸르트벵글러의 전시 음원들은 60년대에 들어 소련 국영 레이블 멜로디야에서 LP화 되었다. 그 중 1944년 12월 19~20일의 베토벤 교향곡 제 3번은 미국의 해적 음반사 "우라니아"에 의해 서방 세계에 출시되었는데, 특유의 공격적이고 광포한 음향으로 명성을 얻었다. 염가 복각 전문 레이블 Archipel이 그 "우라니아" 초반 LP를 마스터로 하여 복각시킨 CD이다. 그냥저냥 들어줄만한 음질에 염가라는 매력때문에 집어들게 된 CD. 최근 출시된 멜로디야의 리마스터링한 푸르트벵글러 전시 녹음 시리즈의 동곡 녹음으로 교체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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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교향곡 제 4번, "코리올란" 서곡 -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43.6.27~30.(일본 유니버셜): 2004년 푸르트벵글러 사후 50주년을 맞아 고인의 팬층이 두터운 일본에서 기념으로 냈던 일련의 세트들 중에 속해있는 녹음. 음원 자체가 43년 6월 27일과 30일에 있었던 두 개의 동곡 연주를 짜맞추기했기 때문인지, 왠지 또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맛은 약하다. 하지만 연주 그 자체는 베토벤 교향곡 제 4번에 대해 "일종의 쉬어가기" 라고 생각하는 기존 인식을 재고케 할만한 점이 있다. 1악장 도입부의 무겁고 어두운 긴장감이 밝은 분위기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이후 부분 전체에 걸쳐 숨겨진 배경으로서 깔려있는 듯한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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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교향곡 제 5번, 제 7번 -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43.6.30./1943.11.3.(DG): 아마도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을 전시 녹음 음반일 듯 하다. 1987년 모스크바 방송국에 보관되어 있던 전시 녹음 음원 마스터 테이프들이 일련의 협상을 거쳐 독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바로 그 마스터 테이프를 기본으로 복각한 음반이다. 음질 자체의 향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하나, 푸르트벵글러 특유의 놀라운 지휘 감각을 맛보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나 구스타프 두다멜 등이 20세기 후반 이후 녹음한 같은 커플링의 녹음들과 비교해보면 무척 재미있다. 푸르트벵글러의 음악 세계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치게 되는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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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교향곡 제 6번 Etc. -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44.3.19.(Melodiya): 러시아 국영 음악사 "멜로디야"에서 소련 시절부터 남아있던 푸르트벵글러 전시 녹음 음원들을 새로이 리마스터링해서 재출반한 일련의 전시 녹음 세트들 가운데 하나. 1944년 3월 19일날 방송용으로 녹음되었던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의 전체 프로그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장 상태 좋은 마스터 테이프가 보관되어 있다는 기존의 통설을 증명하듯이 비교적 좋은 음질을 들려준다. 압권은 역시 4악장의 폭풍우 장면으로, 그야말로 '휘몰아치는' 느낌이다. 함께 수록된 베버의 "마탄의 사수" 서곡,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제 2번" 역시 듣는 맛이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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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 교향곡 제 9번 -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etc., 1942.3.22.(Melodya): 이 음반 역시 위의 제 6번과 마찬가지로 멜로디야의 새로운 리마스터링 세트들 중 하나이다. 흔히들 푸르트벵글러의 3대 "합창" 녹음으로 손꼽히는 42년, 51년, 54년 연주들 중 유일한 전시 녹음인데, "합창"이 조물주의 창조의 위대함에 대한 인간들의 찬사라기보다는 일종의 대혼란과 파국 그리고 그에 대한 공포를 묘사한다고 보는 일부의 시각에 부합하는 연주를 들려준다. 4악장 말미의 어마어마한 폭주, 20분에 육박하는 3악장, 1악장에서 등장하는 더블링한 팀파니의 굉음 등 감상자를 놀라게 하는 푸르트벵글러 특유의 스타일이 고도의 긴박감과 함께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감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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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J.H

2008/02/07 19:36 2008/02/0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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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을 원하시면 플레이 버튼을 누르세요)

모루 위에 올려진 쇳덩이마냥 무지막지하게 시험당하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 바흐의 오르간 작품들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 나에게 기묘한 위안을 제공한다. 어차피 나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스러운 감정들도, 이 세계라는 거대한 범주 내에서는 실로 보잘것없이 작고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섭리(신의 섭리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가 보여주는 극히 작음에서 헤아릴 수 없이 큼에 이르는 그 질서정연하고도 가차없는 움직임 앞에서 내 존재란 아무리 크게 잡아도 기계장치의 기어들 사이에 끼여있는 잡티나 다름없지 않은가. 기어가 돌아가면서 잡티를 무자비하게 으깬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그 잡티가 제 딴에는 제아무리 큰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온몸으로 외친다 한들 세계라는 이름의 기계는 전혀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

치밀하기 그지 없는 수학적인 연산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오르간의 음향 속에 새겨지는 저 세계의 모습을 '듣고' 있자면 절로 겸허함을 갖추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 겸허함을 통해, 때로는 무자비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묵묵히 수긍할 수 있는 마음의 평온을 찾게 된다. 자연법칙의 기본 중 기본인 수학을 통해 음악이라는 형태의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음악가, 바흐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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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 오르간 리사이틀 - 칼 리히터, 제네바 빅토리아 홀 오르간(1954) : 바흐를 경배하는데 온 일생을 다 바친 지휘자이자 연주자 칼 리히터는 오르간 연주에 있어서도 일류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남긴 바흐 오르간 작품 연주 녹음은 두 종이 있는데, 이것은 데카에서 녹음된 것으로 현대 오르간을 사용하여 매우 품격있고 웅혼한 연주를 들려준다. 녹음 년도가 년도인 만큼 음질의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아쉬운 점이 많지만, 바흐 오르간 작품은 일단 뭔가 숭고하고 웅장한 - 종교적인? -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한번 쯤은 들어봐야 할 음반이다. 문제는 구하기가 이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 위 표지의 본사반은 폐반된지 이미 오래이고, 일본 유니버셜에서 LP 발매 당시와 같은 구성으로 내놓은 라이센스반은 본사반과는 달리 뒷부분 3트랙이 잘려나갔다는 문제가 찝찝하다. 모 싸이트를 통해 mp3로나마 소장하고 있지만......(이 포스팅에 삽입된 BWV.565가 바로 그 mp3이다) 어찌되든 간에 현재로서는 구하고 싶은 음반 1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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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 오르간 작품집 - 칼 리히터, 얘거스보르크, 프라이부르크 오르간 (1964, 1967, 1969, 1980) : 칼 리히터의 바흐 오르간 작품 연주를 듣고 싶다면 현재로서는 유일한 선택이 될 듯 하다. DG 오리지널스로 재출반되면서 음질의 향상은 물론 기존 LP 시절 여러 장으로 분산되어 있던 각 음원들을 단 3장의 CD에 눌러담다시피 했으니...... 일단 이 음반만 사면 DG와 Archiv 레이블로 존재하던 리히터의 바흐 오르간 작품 연주는 다 들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위의 데카 음반은 아마도 절대로 본사 재출반이 이루어지지 않을 듯 하다.(데카와 DG는 같은 유니버셜계 음반사니까.... 같은 연주자의 같은 레퍼토리를 또 내줄 리가 없을 것 같다) 연주는 데카 반과 비교해볼 때 전체적으로 좀 더 빠른 템포에 기계적인 음향을 들려주고 있는데, 듣고 있다보면 때때로 MIDI 사운드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종교적인' 바흐보다 '수학적인' 바흐에 더 초점을 맞춘 듯한 느낌인데, 바흐가 실제로는 종교인으로서의 신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해 교회 음악을 많이 작곡했음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해석이 훨씬 설득력있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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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7 23:40 2007/10/27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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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뵘의 지휘 스타일과 해석에 대한 비판들은 대개 비슷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완고함, 경직성, 보수적인 접근 기타 등등. 확실히 자유분방한 개성의 표출과 기존과는 색다른 독특한 해석이 중요시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구세대 거장 지휘자들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스타일은 고루하고 진부하게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뵘과 그의 음악 세계가 오늘날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존숭받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구성원들은, 너무 많고 다양해진 기준들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확고한 논리 구조 위에 세워진 원칙이 삶을 규정지어주었던 과거의 모더니즘에 향수와 동경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뵘은 구세대 전통의 현현이자 굳건한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로 모든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영원한 지표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전제로 할 때, 브람스의 교향곡들은 칼 뵘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특히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구세대의 전통을 대변하는 또 다른 상징물들과 결합했을 때는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낭만주의의 정신과 고전주의의 형식을 조화롭게 융화시키고자 했던 브람스의 음악관은, 옛 시대의 충실한 전승자와 그 시절 이래로 변함없는 전통을 유지해오는 악단들에 의해 감상자에게 선명하게 다가오게 된다. 그것은 마치 옛 장인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지는 오래된 마호가니 책장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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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람스 교향곡 제 1번 - 칼 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59): 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 관련 카페나 사이트 등에서 브람스 교향곡 제 1번의 명연으로 추천되고 있는 음반. 현재 CD로 구할 수 있는 것은 독일 국내에만 유통되는게 원칙인 엘로퀀스 반과, 일본 유니버셜의 로컬 반 두 종 뿐인 듯 하다. 왼쪽의 자켓 사진은 일본 로컬 반으로, 50여년 전의 녹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수준으로 음질을 끌어올린 정성어린 리마스터링에서 지휘자에 대한 그네들 특유의 매니아틱한 애정이 느껴진다. 물론 일본 로컬 반 특유의 그러한 정성이 되려 게이샤의 진한 화장처럼 거부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50년대 후반의 뵘의 해석은 엄격함과 강고함을 두루 갖춘 화강암괴를 연상케 한다. 강렬함과 속도감으로 명성 높은 6년 후 바이로이트에서의 "반지" 연주의 원천이 어디인지 짐작케하는 구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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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베르트 교향곡 제 2번 / 브람스 교향곡 제 2번 - 칼 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77. 6. 28): BBC Legends 시리즈로 구할 수 있는 1977년 6월 28일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의 실황 연주 기록이다. 굳이 위의 글에서 써놓았던 것처럼 빈 필이나 베를린 필같은 독일-오스트리아계 연주단체에 연연하지 않고, 칼 뵘의 명인기는 어느 연주 단체와 함께해도 균일함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다. 노년의 뵘이 보여주는 완숙미, 그리고 관조적이고 유장해진 곡 해석 등이 매력적이다. 조금쯤 딱딱함이 누그러진 듯한 모습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고유의 음색 상의 특징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악장 사이의 휴지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관객석의 소음, 그리고 각 곡의 피날레 직후에 터져나오는 우렁찬 박수갈채는 당일의 연주가 얼마나 관객들을 몰입케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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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람스 교향곡 제 3, 4번 - 칼 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75): 왼쪽의 자켓 사진은 엘로퀀스 독일 로컬반의 것이다. 수록된 음원은 시중의 매장 및 인터넷 음반 쇼핑몰 등에서 팔리고 있는 뵘과 빈 필하모닉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DG 콜렉터스 시리즈)에 수록된 것과 동일하다. 사실 뵘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은 굳이 이래저래 짜맞출 것 없이 DG 콜렉터스 시리즈 하나만 구매하면 간단히 갖출 수 있다. 하지만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브람스 1번 교향곡 연주가 너무나 듣고 싶었던 동시에, 동일 곡에 대해 같은 지휘자의 중복된 음반을 갖추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아집 때문에 또 한번 괜한 짓을 하고 말았다. 연주 자체는 오랜 세월동안 정평이 나 있는 그대로, 빈 필하모닉의 고색창연함 속에서 브람스의 깊은 맛을 음미하기엔 더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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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J.H

2007/07/01 23:50 2007/07/0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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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대표할만한 음반으로 제가 선정한 것은 바로 아바도의 "마술피리" 신보입니다. 지난번 포스팅 말미에 제공해드렸던 힌트들은 다음과 같이 정답과 관련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마술피리"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이고, 아바도의 음반은 올해 중순에 새로 발매된 신보였으며, 현존하는 최고의 말러리안 아바도가 말러의 이름을 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녹음하였다는 점에서 말러와도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겠지요.

"아바도가 모차르트를?"이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 아바도가 손댄 모차르트 작품 녹음들 중에는 널리 인정받는 것들이 제법 있습니다.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녹음했던 "돈 조반니"도 그렇고,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루돌프 제르킨과 협연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같은 명연도 그 예입니다. 물론 호그우드나 가디너같은 정격 연주 진영의 전문 모차르티안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전문성 측면에서는 한 수 접어두어야 하겠지만, 연주 그 자체로만 평가한다면 아바도의 모차르트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완성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가 정격 연주와 고전적 필하모닉 스타일 연주로 크게 갈려져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아바도는 절충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는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음반 역시 그의 그러한 음악관을 잘 반영하여, 현대 악기를 사용하는 중간 규모의 연주단체에다 정격 연주 고유의 해석 및 연주 스타일을 접목시킨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접붙이기"는 매우 괄목할 만한 성과물을 탄생시켰습니다. 경쾌한 속도감과 적절히 풍부한 음색이 동시에 느껴지는, 상호 보완의 효과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아바도가 선발한 가수진입니다. 자라스트로 역을 맡은 르네 파페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름이 생소한 신인들로 채워져 있는 가수진입니다만, 예상 외로 훌륭한 성악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최고 수준의 지휘자가 메이져 레이블에서 행한 유명 작곡가의 유명 작품 음반이라고 해도 꼭 명성 높은 가수들만 기용해야 할 필요도, 그럴 이유도 없음을 역력히 보여주는 쾌거라고 평가하고 싶군요. 각 배역의 가수들 모두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여 즐겁고 낭랑하게 노래부르고 있는 것을 들으면 절로 마음이 흥겨워집니다.

정리하자면 아바도의 절충주의적 스타일이 젊은 신예들의 잠재력을 잘 촉발시켜, 과거의 숱한 "마술피리" 명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멋진 결과물로 어우러졌다고 말할 수 있는 음반입니다. 올해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라는 이유로 숱한 모차르트 관련 음반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바도의 "마술피리"는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의 위치에 있다 할 것입니다. "마술피리"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 아바도를 선호하시는 분들이라면 구입하셔도 "절대!" 후회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ps: 2006년의 대미를 장식하는 포스팅이 되겠군요. 이 변변찮은 블로그를 찾아와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뜻하시는 바 모두 이루어지는 2007년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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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J.H

2006/12/31 23:13 2006/12/3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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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라는 슬로건에 클래식 음악계 전체가 온통 들썩였던 2006년이었습니다만, 특히 불황의 극치에 다다른 상황이었던 음반 업계는 서양 음악사에 짧고 강렬하게 영원한 자취를 남긴 이 요절한 천재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했습니다. 신보 뿐만 아니라 묻혀져 있던 음원들의 발굴 그리고 기존 음원의 재발매 등의 분야에서도 엄청난 숫자의 음반들이 출시되었는데, 그 와중에 기존에 고가로 발매되고 있었던 명성이 자자한 명연주가 저렴한 가격과 새로운 포장으로 재발매되어 몇몇 애호가분들의 속을 쓰리게 만든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 마리아 호앙 피레스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입니다.

이미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반은 릴리 크라우스의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스테레오 디지탈 녹음 시대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피레스의 연주도 기회가 닿으면 꼭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가격이었는데, 기존에 발매되던 전집은 10만원에 육박하는 고가인 탓에 감히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오페라 박스물도 5만원 선인 상황에서, 아무리 개인적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매우 좋아한다고 해도 10만원 가까운 돈을 주고 사야 하겠는가, 라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손가락만 빨고 지내던 차에,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라는 명목 하에 DG에서 몇몇 명연주들을 저가 박스물로 재발매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중에 피레스의 전집반도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포장과 절반의 가격, 더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해외 공동구매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명성만 들었지 실체를 접하지 못하여 매우 궁금했던 연주였는데, 일단은 기대 이상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크라우스의 모노 녹음이 세피아 톤의 흑백사진처럼 명암이 매우 뚜렷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의 연주였다면, 피레스의 스테레오 디지탈 녹음은 선명한 단색의 단정한 배치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몬드리안 풍의 차가운 추상화를 연상케 했습니다. 완벽한 기교를 외형으로 갖추고 그 속에 즐거움이나 명랑함보다는 쓸쓸함과 고즈넉함을 더 많이 담아내고 있었기에 크라우스의 연주에 익숙해져 있던 저로서는 상당히 색다른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녹음의 특성 차이도 물론 고려해야 하겠지만, 40여년의 세월 차가 있는 두 여성 피아니스트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모차르트 피아니즘의 차이는 흥미롭습니다.

피레스는 18세기 오스트리아의 궁정과 살롱에서 연주되었을 피아노 소나타들에게, 20세기의 현대적인 시각에서의 재해석을 가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과거에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아름답고 즐겁고 우아하게"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주자들의 관점이었는데, 20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선입관에 대해 여러 가지 형태의 도전들이 행해졌습니다. 아르농쿠르와 가디너 등의 지휘자들이 이끌고 있는 정격 연주의 새 바람은 그 대표적인 사례지만, 피레스가 행한 바와 같이 일견 단순히 아름답게만 보이는 작품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모차르트의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들을 끄집어내려는 것 또한 그러한 도전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 일부 작품들의 연주가 보여주는, 아름답고 즐거운 외형 속에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슬픔과 비애감은 모차르트라는 한 인간의 내면을 살짝 엿보는 듯한 감상을 안겨주었습니다.

고대했던 연주를 듣고 예상 이외의 감상을 얻게 되었으니 이 음반을 매우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만, 그래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한 해 동안 구입했던 모든 모차르트 관련 음반들 중에서는 아쉽지만 차석에 그치게 되었습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한 해를 대표할만하다고 개인적으로 선정한 음반의 소개 및 평가는 다음 번의 포스팅으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궁금해하시는 분들은 다음의 힌트들을 보고 제가 어떤 음반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대표 음반"으로 뽑았는지를 한번 맞춰보세요. 오페라이고, 신보이며, 말러와 상당한 관련이 있습니다.

PS: 맞추셔도 상품은 없습니다......^^;; 그보다 그런 걸 궁금해하실 분이 과연 계시기나 할런지?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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