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영상물을 끝까지 보고 난 직후에 느낀 것은 일단은 "끝났구나"라는, "반지" 전 싸이클을 섭렵하고 나면 언제나 느끼는 묘한 안도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내용의 길이가 14시간에 육박하는 초장편 악극이 되다 보니, 감상 도중에도 이따금씩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는 일이 있게 되지요. 요즘의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매체들은 바쁘기 그지없는 현대인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되도록 짧은 시간 내에 최대의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느라 고심하는데, 바그너 영감께선 19세기의 사람이신지라 그런건 전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21세기의 감상자들만 반죽음 내지는 초죽음이 되는 거지요. 오죽하면 "바그너의 작품이 감상자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상연되는 탓에 피곤의 극치에 이른 감상자가 비판적 사고의 능력을 잃기 때문이다."라는 블랙 유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신들의 황혼" 3막의 막이 떨어지는 순간이 되면 일단은 안도의 한숨부터 쉬고 보는 겁니다. 용케도 버텼구나, 라는 심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이런 생고생을 해가면서까지 "반지"를 보는 이유가 뭐냐, 라고 물으신다면 사실 명쾌하게 답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흡연자에게 몸에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왜 담배를 피우는가, 하고 질문하는 상황과 유사하달까요. 굳이 설명을 해보려는 헛된 노력을 해보자면, 적어도 저의 입장에서는 한 세계의 멸망이라는 거대하고 심각한 주제가 음악과 연극의 결합이라는 방법을 통해 구현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커다란 규모의 카타르시스의 정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그런 것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신들의 황혼" 마지막 순간의 대 클라이맥스가 주는 카타르시스의 정화 효과는 한번 경험하게 되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최종적인 파국"으로 인해 일순간에 사라져가는 세계를 지켜보며 느끼는 감정의 강렬함이 워낙 큰 탓입니다.
그런데, 이 영상물에서 연출가는 그처럼 큰 감정의 분출을 일으키는 결말부의 처리에 있어서 "파국"을 통한 절대적인 해결을 명쾌하게 보여주지 않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엉뚱한 장면을 구성함으로써 되려 감상자로 하여금 의문에 빠지게 만듭니다. 거대한 불길이 신들의 전당을 덮치는 순간을 TV를 통해 지켜보는 사람들과, 그들의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는 알베리히, 그리고 그런 알베리히의 앞을 한 쌍의 소년 소녀가 조그마한 손전등으로 자신들의 발 앞을 비추면서 지나간 직후 막이 떨어집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한 번의 감상 만으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연출자 하리 쿠퍼는 과연 무슨 의도로 그런 결말을 보여주었던 것일까요? 이와 같은 당혹스러운 결말 때문에, 뵘이나 자발리쉬 등의 "반지" 전 싸이클을 들은 직후 느꼈던 카타르시스의 정화를 통한 만족감은 이번에는 솔직히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반지"의 세계가 결정적인 파국을 맞아 멸망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그 때문에 바렌보임과 쿠퍼의 "반지" 바이로이트 (유사)실황 영상물들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 더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럴 여유는 당분간 전혀 없을 것 같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충 이 정도로 바렌보임과 쿠퍼의 바이로이트 (유사) 실황 "신들의 황혼" 을 본 소감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결말이 준 불만족스러움과는 별개로 연주 수준과 가수들의 연기는 정말로 만족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강병운 교수님의 하겐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그저 음흉한 흉계를 꾸미는 야수같은 악당이 아니라, 아버지 알베리히 때문에 억지로 떠밀린 숙명에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연료삼아 야망의 불길을 활활 태우는 용맹과 지략을 고루 갖춘 전사라는, 제가 언제나 상상해오고 있던 "반지"의 하겐 이미지에 매우 근접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80년대 "영웅본색" 등의 홍콩 느와르 영화를 연상시키는 복장의 덕도 좀 보신 것 같습니다만.......^^;
Posted by A.J.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