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 많고 많은 브람스 교향곡 전집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자연스럽게 먼저 손이 가게 되는 음반은 단연코 뵘과 빈필의 70년대 녹음이다. CD 재발매에도 불구하고 별로 나아지지 않은 리마스터링 상태가 옥의 티이지만, 음질 상의 아쉬움을 잠시 접어둔다면 높은 하늘 아래 낙엽지고 소슬한 바람이 불며오는 정경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음반이기 때문이다.
뵘과 베를린 필의 1959년도 브람스 1번 교향곡 연주가 이 전집에 수록된 동곡 연주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진국이 우러나온다고 할만 한 연주는 오히려 빈 필 쪽인 듯 하다. 59년도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것은 가을의 정경이라기보다는 늦여름의 열기와 같은 장년의 브람스의 패기이다. '가을의 브람스'는 더 여유롭고 풍성한 음향과 해석을 들려주는 70년대 전집 쪽이 한층 납득이 가게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 위 문단에서는 1번 교향곡에 국한하여 살펴보았지만 사실 '좀 더 여유있고 풍성하게'라는 수식어는 뵘의 70년대 브람스 교향곡 전집 전체를 관통하는 해석 상의 핵심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한가을 오후에 낙엽이 가득한 숲 속을 거닐 때 느낄 수 있는 원목의 향기에 비견할만한 풍미가 잔잔하게 느껴진다. 다른 지휘자들도 제각각의 풍미를 띄는 브람스를 들려주고 있지만,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에 걸맞는 품격과 원숙함 그리고 지휘자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겸양은 뵘 만의 것이다.
이 음반을 '맛깔난다'라고 평가하기는 무리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처음 접하면 되려 매우 심심하고 평범한,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무덤덤함이 부각되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최근에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싫어하던 가지 나물을 정말 맛있다고 느끼며 먹게 되었다. 뵘의 70년대 브람스 전집은 바로 그 가지 나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처음 접할 때는 수수하고 약한 인상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은은한 풍미가 느껴지는......
LP 시대 말러의 숨은 명인 야샤 호렌슈타인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1959년 3월 20일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의 실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음반이다. 이 실황은 일설에 따르면 "천인"의 영국 초연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국내에서는 누가 처음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급성 성령중독증" 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연주다.
50년이나 묵은 라디오 실황 음원에게 오늘날의 디지털 스테레오 음원들 정도의 음질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다. 비록 스테레오로 녹음되었고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쳤다고 하나, 그런다고 해서 반 세기라는 그 긴 세월을 뛰어넘는 기적이 일어날 리도 없다. 분명히 부제에 걸맞게 수많은 인원의 독창자들 및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굉음에 가까운 음향을 내뿜어야 할 작품이지만, 실제로 이 음반이 내는 소리는 답답하고 빈약할 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단점이 묘하게도 장점으로 작용한다. 딱히 종교적인 성향을 강조하는 음악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종교 합창 음악처럼 들리게 만드는 것이다. "천인"의 영국 초연이라는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연주 자체는 불안정하고 실수도 잦지만,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그리고 독창자들과 합창단이 보여주는 거의 종교적 열정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의 정열과 진지함이 그 모든 흠결들을 눈감고 넘어가게 만든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순간들이 1악장 클라이맥스와 2악장 전체이다. 전자에서는 동곡의 다른 음반들에서 쉽사리 경험할 수 없는 고도의 상승감과 구조미가 느껴져, 그 앞까지의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고 의욕만 앞세우는 듯이 보였던 시간들을 싸그리 잊게 만든다. 그리고 후자는, 그 텍스트의 원천이 괴테의 "파우스트" 2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마태 수난곡의 축약판이라도 듣고 있는 것처럼 감정의 한 부분을 쥐어뜯는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연주라 해도 그냥 미미하게 지나가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로 불완전하고 미숙한 연주라고 해도 듣는 이의 마음을 마구 헤집어놓는 경우가 있다. 정신적인 면에서의 감흥이 두드러지는 호렌슈타인의 이 연주는 당연히 후자에 위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급성 성령중독증",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딱 들어맞는 별칭이자 찬사가 아닐 수 없다.
ps(2008.8.27): 이 음반의 녹음 상황 및 내용에 대해 훨씬 자세하고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DC 인사이드 클래식 갤러리 "허름한괴링" 님의 게시글을 참조할 것. 이렇게 공력있는 분의 글을 보고 나면 난 아직 멀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됨. "8번 영국 초연설"같은 거짓부렁을 내 귀에 흘려넣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카라얀이 남긴 여러 개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 중, 국내에서 특히 평가가 좋은 편인 70년대 전집을 최근 들어보았다. 카라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가오는 9월에 재발매될 연주이나, 현재까지 알고 있는 바로는 새로 나올 음반은 딱히 음질 면에서 향상되었다는 말도 없고 가격은 예전 발매된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 로컬로 출시된 DG Eloquence의 염가반을 구매하였다.
교향곡 전곡과 "코리올란", "레오노레", "에그몬트" 등 여러 서곡들이 포함된 총 6장의 구성으로 교향곡 전곡만 수록하여 5장으로 편성하는 전형적인 베토벤 전곡반 구성보다 한 장이 더 많다. 하지만 정작 실제 체감한 바로는, 5장짜리 구성의 타 지휘자들의 음반보다 되려 감상에 걸린 시간이 짧았다. CD 수가 한 장 더 많고 여러 서곡들이 포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뭘까.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조합은 듣는 이로 하여금 딱 한가지 만큼은 확실히 보장한다. 그것은 바로 극상에 달한 오케스트라의 기능미이다. 순수하게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해볼 때 카라얀은 '완벽'하다. 그의 방대한 음반 작업의 결과물들을 통털어 평균적으로 바라볼 때, 분명 그는 동시대의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연주에 있어서 실수나 착오를 일으키는 일이 적다. 아니, 거의 없다.
그러나 그 뿐이다. 카라얀의 대다수 관현악 녹음들은 단지 잘 만들어진 "레디메이드" 상품으로서의 가치 이상을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 음반들과 오페라 음반들은 조금 다른 평가를 내려줄 수 있겠지만, 70년대의 이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그런 예외적인 사례에는 들지 못한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피아니시모, 완벽한 박자감각, 혼연일치하는 현의 놀림, 거기에 최고조에 달한 70년대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더해졌지만, 그러한 미덕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 전집은 자동차로 치면 "쾌적한 승차감"을 제공하는데서 그치는 것이다.
푸르트벵글러의 영감어린 연주, 가디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재발견의 신고전성에 비하면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상대적으로 매력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 별로 큰 감흥을 주지 못한 채 쌩쌩 지나가 버린 것이리라. 새로이 베토벤 교향곡의 세계에 진입하려고 하는 초심자들에게는 이 음반이 매우 훌륭한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심하게 저평가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그래도 곁에 가까이 두고 자주 들을만큼 아끼고 사랑하지는 못하겠다.
“한번은 어느 경과구에 대해 그에게 물었습니다. ‘박사님, 여기는 얼마나 빠르게 해야 합니까?’ 해결을 보지 못한 물리학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아, 그건 어떤 소리가 나느냐에 달렸습니다.’” - 세르주 첼리비다케
“서주에서 주테마로 넘어가는 이행부에서 그는 콘트라베이스 부분 다음에 현악의 시작 신호를 너무 작게 주어 손동작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콘서트마스터가 물었지요. ‘박사님, 시작 신호를 더 분명하게 주실 수 없을까요?’ 푸르트벵글러가 대답했습니다. ‘분명하지 않을수록 좋아요.’” - 오렐 니콜레, 1947년 루체른에서 「레오노레」서곡 3번 연습 당시의 일화
“아주 느리게 연주하면서도 듣는 이의 머리 속에 전체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일은 위대한 지휘자만이 가능합니다. 푸르트벵글러가 그런 사람입니다. 내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1950년 푸르트벵글러가 아르헨티나에서 「마태 수난곡」을 연주할 때 나는 보조 지휘자였습니다. 그의 속도는 유행에 뒤졌고 지독하게 느렸지요. 나는 그의 연주 방식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내면에서 끊이지 않는 그 거대한 흐름에 감탄했습니다. 그건 그한테서만 흘러나오는 것이었어요. 이 작품을 너무나 강렬하게 느낀 푸르트벵글러는 함께 연주하고 노래한 350명의 연주자들에게 그 느낌을 전달했습니다. 그건 최면으로까지 이어지는 심리적인 힘이었습니다.” - 미하엘 길렌
“그는 연주를 자주 반복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한 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연주했고 마이크로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녹음은 훌륭했다. 그때 우리가 막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도입부가 일치하지 않았다. 당장에 전화벨이 울렸다. 푸르트벵글러는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여기는 미국이 아닙니다!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합니다!’” - 오렐 니콜레, 1951년 12월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슈베르트 교향곡 다장조 녹음 당시 일화
“푸르트벵글러가 3막 직전에 넣은 「레오노레」서곡 3번은 단원들이 자면서도 연주할 정도의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연습 내내 이 작품에 몰입해 있던 푸르트벵글러는 자꾸만 크레센도를 요구했다. 계속해서 크레센도가 이어지자 우리 콘서트마스터가 악보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총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군요, 그래도 이게 더 아름다워요.’ 그토록 그는 음악에 빠져 주변의 것들은 모조리 잊어버렸다.” - 발터 바릴리, 1953년 10월 12일 「피델리오」연습 중의 일화
*이상은 모두 헤르베르트 하프너, 이기숙 옮김, 「푸르트벵글러」(마티)에서 인용함
베토벤 교향곡 전집 - 푸르트벵글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스톡홀름 필하모닉, 바이로이트 축제 오케스트라 & 합창단(EMI): 이 푸르트벵글러 유일의 공식 전집에 대한 상세한 감상은 예전의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거기에서는 '옥석혼효'라고 평가했지만, 그 후 여러번 감상을 거듭할수록 오래되어 세공이 깨지거나 무뎌진 채로 빛이 바랜 보석더미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 음반이다. 명연이니 졸연이니를 따질 것 없이, 클래식을 듣는다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꼭 한번 쯤은 이 전집에 다다르게 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여기 포함된 1951년 바이로이트에서의 9번 실황이야말로 푸르트벵글러의 연주 스타일에 있어서 일종의 중대한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설적인 전후 공연집" -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NDR 심포니 오케스트라(Tahra): 1951년에서 1954년까지의 일부 연주들을 총 4장의 CD에 수록하고 있는 음반. 전후 시기 푸르트벵글러의 실황 연주들 중에서도 특히 평이 좋은 것들을 선별하여 담고 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베토벤 교향곡 3, 5, 6번 연주, 1954년 루체른에서의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 NDR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브람스의 교향곡 1번 및 하이든 변주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뜻 들어보면 전시 녹음들의 강렬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져 보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푸르트벵글러가 최만년에 도달한 경지를 느끼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게끔 하는 연주들이다.
베토벤 교향곡 7, 8번 - 푸르트벵글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Orfeo): 1954년 8월 30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있었던 실황을 그대로 담은 음반이다. EMI의 전집에서 조악하기 그지 없는 음질로 아쉬움을 남겼던 스톡홀름 필하모닉과의 8번 연주를 대체하기에 안성맞춤으로, 8번과 같은 '마이너'한 작품에 대해서도 푸르트벵글러가 연구와 탐색을 그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50년대 중반의 녹음으로 음질도 푸르트벵글러의 모든 음반들 중에서 매우 좋은 축에 든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그해 11월 30일에 영면한 푸르트벵글러로서는 빈 필하모닉과의 마지막 공식 연주였는데, 당시 그가 여러 지병들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 자체에서는 병기운 같은건 찾아볼 수가 없다. 오로지 베토벤의 음악 그 자체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구현하는 거장의 모습만이 들어올 뿐이다.
바그너 관현악곡집 - 푸르트벵글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DG Eloquence): 1949년부터 1954년 사이,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가진 여러 바그너 관현악곡 연주 실황들 중 일부를 발췌해서 수록한 음반. 시기도 장소도 제각각이고 그에 따라 녹음 상태도 들쑥날쑥이지만, 다행스럽게도 EMI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2번과 8번 같은 '재앙'은 없다. 1951년을 경계로 푸르트벵글러의 지휘 스타일이 좀 더 완숙해졌음을 확인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는데, 1949년의 "명가수" 서곡과 1954년의 "장송행진곡"을 비교해보면 그 점이 확연히 느껴진다. 푸르트벵글러의 바그너 관현악곡집이라고 하면 EMI에서 나온 빈 필 및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스튜디오 녹음 연주들이 또한 유명한데, 언젠가 그쪽도 구해서 이 음반과 비교해보면 실로 재미있을 것 같다.
칼 뵘과 빈 필하모닉의 70년대 베토벤 교향곡 스튜디오 전집. 도대체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걸까. 위 사진은 지난 2004년에 한국에 반짝 수입되었던 이탈리아 유니버셜의 로컬반. 이것도 이제 폐반이 되어 더이상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현재로선 프랑스 DG에서 발매한 DG Double 로컬반들로만 이 연주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음질에 대해서 약간 얘기가 있는 것 같아 구매할 마음이 잘 안 든다. 뵘과 빈 필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프랑스 DG, 일본 유니버셜, 이탈리아 유니버셜 이렇게 세 곳에서 각각 로컬반으로만 발매되었는데, 개중에는 이탈리아의 것이 가장 음질이 좋다는게 세간의 평이다.
언젠가는 본사에서 발매하겠지 싶어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는데 솔직히 슬슬 한계다. 이탈리아 유니버셜의 전집을 노려볼까 했는데 폐반되었다고 하니 중고로도 구하기가 힘들 것 같고, 프랑스 로컬반의 음질 문제에 대해 좀더 알아본 다음 최종 결정을 내려봐야 겠다.
DG 본사는 왜 이다지도 뵘의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저평가하는 걸까? 카라얀의 베토벤 CD 전집은 자그마치 3종이나 있으면서, 정작 아직도 세계적으로 수많은 팬들이 엄연히 건재한 뵘의 전집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무슨 이유로? OIBP따윈 바라지도 않으니 콜렉터스 에디션으로라도 좀 내줬으면 좋겠다. DG 본사에 항의성 질문 메일이라도 보내야 할까보다.
ps: 이탈리아 로컬반 중고 파실 분 혹시 없나요? 상태가 A급이면 구매 당시의 가격을 그대로 드리고서라도 꼭 사고 싶습니다. 의향 있으신 분은 이 포스팅의 답글 혹은 방명록이나 메일 Keffenhiller@gmail.com 으로 연락 주십시오. ps2: 혹 프랑스 DG Double 시리즈 로컬반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시면 음질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상세히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프랑스판 DG 더블은 음질에 문제가 있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마스터링을 어떻게 했는진 몰라도 음색이 프랑스적이라고나 할까, 다소 고역이 강조된 음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뵘의 베토벤 교향곡 뿐 아니라 프랑스판 더블 시리즈 전체에서 공통된 경향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이게 또 국내 라이선스반은 별로 그렇지 않았으니 재미있는데, 반면 음질은 국내판보다는 프랑스판 쪽이 그래도 좋았다고 기억됩니다. 그런데 DG 더블이 이탈리아판보다 훨씬 더 전에 나온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10년은 된 것 같습니다만) 아직 구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미니멀리즘 말러", "버짓 말러" 등의 별명을 지니고 있는 엘리아후 인발과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말러 전집.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작이 바로 1986년의 제 7번 "밤의 노래" 다. 서두에서 언급한 별칭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발의 말러는 은사인 번스타인이 같은 레퍼토리에서 보여주는 과도한 낭만성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광기, 광폭, 대혼란, 폭주 등등, 일부 말러 팬들이 병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표현들은 인발의 말러 해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도 어쨌던 일반인의 눈으로 볼 때 확실히 비주류 중견 지휘자임에는 분명한 인발. 베를린 필이니 빈 필이니 하는 호화찬란하고 뻑적지근한 이름값들을 자랑하는 일류 연주단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 거기에다 손쉽게 이목을 끌 수 있는 자극성과 강렬함보다는 일견 수수하게 들리는 견실함과 명료함을 택한 해석. 소위 말하는 인기있는 말러 연주들 사이에 인발의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은 이상의 이유들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7번 녹음에서만큼은 인발의 해석과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절묘호사"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동곡에 있어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아바도와 시카고 교향악단의 84년도 동곡 구 녹음과 비교해 보면, 비록 아바도가 만들어낸 것과 같은 윤기넘치고 매혹적인 음색과 악상 표현은 없지만, 인발은 그 대신 '파삭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명료하게 보여주는 이지적인 냉철함으로 감상자의 귀를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이처럼 말러라고 해서 꼭 반쯤 정신질환에 걸린 것처럼 들려야만 할 이유는 전혀 없음을 훌륭하게 웅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발의 말러는 가치를 지닌다. 이지적인 냉철함, 그것은 번스타인의 자기도취, 텐슈테트의 처절함, 아바도의 세련된 낭만성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의 무게감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몽환적인 밤의 세계를 담고 있는 악상들을 이토록 무덤덤하고 절제된 시각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있게 그려낼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이 음반은 숱한 말러 녹음들 중에서도 그 나름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ps: "이지적인 냉철함"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불레즈의 말러 해석과 유사하다고 생각치 않았으면 한다. 실제로 들어보면 알겠지만 불레즈와 인발은 상당히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불레즈의 작곡가로서의 자세에 바탕을 둔 이론과 분석에 일차적으로 의지하는 표현과는 달리, 인발은 지휘자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직감에 바탕하여 그 나름의 "이지적인 냉철함"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표현력이 부족한 탓으로 확연히 그 차이를 묘사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칼 뵘의 지휘 스타일과 해석에 대한 비판들은 대개 비슷한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완고함, 경직성, 보수적인 접근 기타 등등. 확실히 자유분방한 개성의 표출과 기존과는 색다른 독특한 해석이 중요시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구세대 거장 지휘자들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스타일은 고루하고 진부하게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뵘과 그의 음악 세계가 오늘날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존숭받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구성원들은, 너무 많고 다양해진 기준들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확고한 논리 구조 위에 세워진 원칙이 삶을 규정지어주었던 과거의 모더니즘에 향수와 동경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뵘은 구세대 전통의 현현이자 굳건한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로 모든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영원한 지표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전제로 할 때, 브람스의 교향곡들은 칼 뵘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특히 빈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구세대의 전통을 대변하는 또 다른 상징물들과 결합했을 때는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낭만주의의 정신과 고전주의의 형식을 조화롭게 융화시키고자 했던 브람스의 음악관은, 옛 시대의 충실한 전승자와 그 시절 이래로 변함없는 전통을 유지해오는 악단들에 의해 감상자에게 선명하게 다가오게 된다. 그것은 마치 옛 장인의 숨결이 생생히 느껴지는 오래된 마호가니 책장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을 때와 비슷한 경험이다.
브람스 교향곡 제 1번 - 칼 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59): 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 관련 카페나 사이트 등에서 브람스 교향곡 제 1번의 명연으로 추천되고 있는 음반. 현재 CD로 구할 수 있는 것은 독일 국내에만 유통되는게 원칙인 엘로퀀스 반과, 일본 유니버셜의 로컬 반 두 종 뿐인 듯 하다. 왼쪽의 자켓 사진은 일본 로컬 반으로, 50여년 전의 녹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수준으로 음질을 끌어올린 정성어린 리마스터링에서 지휘자에 대한 그네들 특유의 매니아틱한 애정이 느껴진다. 물론 일본 로컬 반 특유의 그러한 정성이 되려 게이샤의 진한 화장처럼 거부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50년대 후반의 뵘의 해석은 엄격함과 강고함을 두루 갖춘 화강암괴를 연상케 한다. 강렬함과 속도감으로 명성 높은 6년 후 바이로이트에서의 "반지" 연주의 원천이 어디인지 짐작케하는 구석도 있다.
슈베르트 교향곡 제 2번 / 브람스 교향곡 제 2번 - 칼 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77. 6. 28): BBC Legends 시리즈로 구할 수 있는 1977년 6월 28일 런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의 실황 연주 기록이다. 굳이 위의 글에서 써놓았던 것처럼 빈 필이나 베를린 필같은 독일-오스트리아계 연주단체에 연연하지 않고, 칼 뵘의 명인기는 어느 연주 단체와 함께해도 균일함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가치가 있다. 노년의 뵘이 보여주는 완숙미, 그리고 관조적이고 유장해진 곡 해석 등이 매력적이다. 조금쯤 딱딱함이 누그러진 듯한 모습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고유의 음색 상의 특징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악장 사이의 휴지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관객석의 소음, 그리고 각 곡의 피날레 직후에 터져나오는 우렁찬 박수갈채는 당일의 연주가 얼마나 관객들을 몰입케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반증이다.
브람스 교향곡 제 3, 4번 - 칼 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75): 왼쪽의 자켓 사진은 엘로퀀스 독일 로컬반의 것이다. 수록된 음원은 시중의 매장 및 인터넷 음반 쇼핑몰 등에서 팔리고 있는 뵘과 빈 필하모닉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DG 콜렉터스 시리즈)에 수록된 것과 동일하다. 사실 뵘의 브람스 교향곡 전집은 굳이 이래저래 짜맞출 것 없이 DG 콜렉터스 시리즈 하나만 구매하면 간단히 갖출 수 있다. 하지만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브람스 1번 교향곡 연주가 너무나 듣고 싶었던 동시에, 동일 곡에 대해 같은 지휘자의 중복된 음반을 갖추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개인적인 아집 때문에 또 한번 괜한 짓을 하고 말았다. 연주 자체는 오랜 세월동안 정평이 나 있는 그대로, 빈 필하모닉의 고색창연함 속에서 브람스의 깊은 맛을 음미하기엔 더할 나위 없다.
이런저런 연고가 닿아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2007 교향악 축제"의 첫번째 공연, 부천시향의 브람스 연주회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가보게 된 실황 연주회였는지라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런 기대에 걸맞는 좋은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오늘의 음악회에서 느꼈던 감상 몇 가지를 써 보고자 합니다.
오늘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 2번과 교향곡 제 1번이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감상 경험은 일천하여, 앞의 것의 경우에는 음반으로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고 뒤의 것은 푸르트벵글러와 NDR 함부르크의 1951년도 연주 음반 한 종만을 들어보았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거의 첫 경험이나 다름없는 작품들이었기에 기대는 잔뜩 부풀어오르는 한편 놓치는 점 없이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조금 걱정스러웠습니다만, 다행히도 둘 다 무난하면서도 동시에 흥미롭게 연주된 덕분에 풍성한 경험의 과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의 경우에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번이 처음 듣는 것인지라, 연주 자체가 잘 되었고 못 되었고를 논하기가 좀 그렇군요. 직관적인 감상으로는 독주자로 나선 이미주 씨의 강렬하고 다이내믹한 연주와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서로 잘 어울려서 괜찮은 결과물을 낳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지휘를 맡은 임헌정 교수님이 3악장에서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매우 여리고 부드럽게 만드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왼손을 뻗은 채로 서서히 내리면서 제1, 2바이올린 군의 소리를 피아니시모 이하로 낮추도록 조절하시는 동작에서, 그러한 세심한 노력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더군요.
인터미션 후에 시작된 브람스 교향곡 제 1번의 경우에는 이색적인 관악 구성을 꼭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작곡가가 지시하고 있는 관악군을 더블링하여 두배의 숫자로 금관 및 목관들을 강화한 탓에, 거의 바그너 수준의 오케스트라 구성에 육박할 정도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1악장과 4악장 등 관악에 비중이 상당히 실리는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우렁찬 관악의 함성(?)을 느낄 수 있었지요. 이런 형태의 구성은 당연히 정통적인 브람스 교향곡에서의 관악 구성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브람스 특유의 서정성 내지는 균형성에 주목하는 애호가분들의 경우에는 상당히 불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브람스의 이 첫 번째 교향곡이 "베토벤 교향곡 제 10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베토벤의 제 9번 교향곡 "합창"의 마지막 악장과 같은 위상으로서 이 작품의 4악장을 보는 식의 해석이 이런 결과를 낳은게 아닐까 조심스레 상상해 봅니다.
여하튼 관악기 특히 금관 파트에 매우 무게중심이 실린 "숄티 풍의 브람스" 였지만, 호쾌한 관악의 폭발과 그에 지지 않는 현악의 박력 넘치는 음색은 일반 관객들을 매우 흡족하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밖에 특히 언급하고픈 사항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앵콜곡으로 "주일 미사"(작곡가 이름을 못 들었습니다. 2층이어서...) 와 헝가리 무곡 5번이 준비돠어 있었지만 임헌정 교수님의 컨디션 문제 탓인지 첫 번째 앵콜곡까지만 하고 끝내버리는 바람에 막 무대로 나온 큰북과 트라이앵글 주자 두 분은 뻘줌히 그냥 들어가셔야 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나 놀랍게도 연주회 전체를 통털어 관객들이 박수 미션(?!)에서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뒤의 것은 정말이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보통은 조금이라도 웅장한 코다로 끝맺기만 하면 꼭 한 두 사람 씩은 박수를 치던데 말입니다. 요즘 연주회에 오는 청중들의 공연 감상 매너가 예전에 비해 상당히 향상된 증거라 생각하니 정말 기쁘군요.
클라우스 텐슈테트는 매우 흥미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지휘자입니다. 동독 출신이지만 지휘 활동은 런던 필하모닉을 비롯한 서방의 오케스트라들을 이끌고 더 왕성히 하였는가 하면, 그를 열렬히 추종하는 광적인 애호가 집단은 그의 주 활동무대인 유럽이 아니라 지구 반대편의 일본에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특히 텐슈테트가 지휘한 말러 교향곡들은, 물론 유럽의 평론가들도 높이 평가하고 있긴 하나, 일본의 텐슈테트 매니아들에게서 가장 큰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구할 수 없거나 절판된 음원들이 일본 로컬반 혹은 해적반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텐슈테트와 런던 필의 1991년 실황 역시 EMI 본사의 카탈로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일본 도시바 EMI의 로컬 반으로만 만나볼 수 있는 음원입니다. 이 음반은 텐슈테트의 열렬한 팬들을 비롯한 상당수의 애호가분들이 "말러 6번의 최고봉"이라고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다가, 더구나 언제부턴가 도시바 EMI의 음반들이 한국에 잘 수입되지 않게 되자 희소성까지 생겨서 더더욱 애호가의 구미를 자극하는 물건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저 또한 오랜 동안 이 음반을 찾아다니던 불우한(?) 사람들 중 하나였는데, 때마침 새로 재출반되어 나온 것을 일본에서 살다 건너온 동아리 후배 덕분에 어렵사리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들어온 어마어마한 평가들에 기대치가 한껏 부풀어 있는 상황에서 CD를 플레이어에 걸었는데, 1악장과 2악장은 의외로 무덤덤하게 지나가는 풍이라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애호가들이나 한국의 일부 말러리안들은 텐슈테트가 보여주는 말러 교향곡 해석에 대해 매우 비장하고 웅장한 폭연(暴演)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 음반의 1, 2악장은 그렇게 거창한 말을 들을 수준은 분명히 아닙니다. 매우 무겁고 진중한 음색은 활활 타오르는 활화산이라기보다는 묵직하고 견고히 자리잡은 화강암괴에 더 가깝습니다. 오토 클렘페러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저 유명한 1961년도의 말러 교향곡 2번 1악장과 아주 흡사한 느낌입니다.
기대보다는 무덤덤하게 지나간 1, 2악장에 비해, 3악장은 확실히 텐슈테트가 수준높은 말러 전문가임을 보여주는 순간이라 하겠습니다. "비극적"이라는 부제에 걸맞는 무겁고 비장한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감도는 가운데서도 잠시나마 허락되는 안식처럼 자리잡고 있는 듯한 3악장인데, 텐슈테트와 런던 필하모닉은 여기에서 단순히 평안한 휴식의 한 때를 보여주는 정도를 넘어서서 숭고하기까지 한 아우라를 뿜어냅니다. 마치 극복할 수 없는 운명 앞에 곧 무너져버릴 영웅에게 하늘의 천사들이 동정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는 듯한 분위기는 상당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악장은, 마침내 텐슈테트의 팬들이 그토록 즐겨 말하는 "폭연"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0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강고한 운명에 당당히 맞서 싸우는 영웅의 사투가 생생히 그려집니다. 그 비장하고 장엄한 묵시록의 풍경화는 딱히 비교할만한 상대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고, 특히 해머의 타격음과 제일 마지막 순간에 울려퍼지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비탄에 가득찬 탄식은 아주 강렬한 인상과 감회를 감상자에게 안겨줍니다.
종합하자면 동독 출신이라는 지휘자의 특색에 걸맞게, 기본적으로는 견실하고 견고한 구조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응축된 에너지가 마지막 악장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거대하고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연주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에너지가 임계점에 달해 폭발할 때까지의 시간이 제법 걸리는 탓에, 1, 2악장에서 조금 지루하고 답답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게 흠입니다. "폭연" 운운하는 일부 평론가들 및 텐슈테트 매니아들의 과도한 평가에 너무 신경쓰지 않은 상태에서 접했을 때, 더 큰 감동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음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