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존에 나왔던 멀쩡한 음원들을 마구 뭉쳐서 박스 하나에 쓸어넣고 특가랍시고 팔아대는 요즈음의 추세에는 정말 치가 떨릴 지경이다. 물론 클래식 음반 시장의 불황이 이 사태의 주범이라는 점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 돌파구를 신매체의 등장을 핑계삼은 "떨이 세일"에서 찾고 있는 메이저 음반사들의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못 구하던 음원들을 싸게 구매할 수 있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할 수도 있으나, 제대로 된 해설집과 최소한의 꾸밈새도 없이 조악한 종이 박스에 CD들만 잔뜩 우겨넣은 재발매 박스반들의 천박함은 누가 뭐라고 한대도 참 불만스러운 사항이다.
"피아노의 구약 성경"으로 불리우는 바흐의 평균율 전곡을 안젤라 휴이트가 연주한 Hyperion의 음원이 4For2로 재발매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DG의 Collecter's Edition 시리즈의 바로 그 조악함이었다. 요즘 등장하고 있는 매머드급 구성의 염가 박스물들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이지만, 그 시리즈가 그간 보여 온 음반 구성상의 조악함은 이미 이 바닥에서는 정평이 나 있다. 구매 예약 신청을 넣으면서 혹시나 휴이트의 평균율 재발매 박스물도 그런 꼴이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끝내 뇌리를 떠나질 않았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Hyperion은 매우 성실하고도 세련된 음반 구성으로, 휴이트의 균형잡힌 훌륭한 평균율 연주에 빛을 보탰다. 종이 재질의 CD집을 선택한 것은 아쉬웠지만, 거기 사용된 종이의 재질과 마감 처리, 무엇보다도 각 CD집 뒷면에 삽입된 평균율 각 곡의 주선율 소개 이미지는 그야말로 감동스럽기 짝이 없다. 또한 해설집에도 휴이트 본인이 직접 쓴 소개글과, 실제 평균율의 연주 과정에서 자신이 느끼는 점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3개 언어로 수록되어 음반의 영양가를 더욱 끌어올리고 있다.
똑같은 염가 재발매 박스 전집물인데도 어찌 이리 차이가 날 수 있을까! 뭘 이렇게까지 호들갑인가 할 분들이 계시겠지만,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해설집의 내용을 정말 형식적인 평론가 내지 음악학자들의 구태의연한 소개글이나, 얼마 되지 않는 정보량의 작곡가 또는 연주자 정보로 채우는 메이저 음반사들의 행태와 비교해보면 호들갑을 떨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음반 디자인의 측면에서 이 음반과 메이저 음반사들의 염가 박스물들은 비교조차 힘들 판이다.
그렇다면 연주는? 물론 명불허전이다. 굴드식 천상천하 유아독존 연주나 요즈음 시대악기 연주자들의 점잔빼는 연주와는 분명히 다른, 균형잡히고 중용적인 평균율을 들을 수 있다. 기본기를 닦는 내용의 평균율 1권에서 느껴지는 정성 가득한 충실함과, 점차 명인기적 기교로 채워지는 2권에서의 자신감 넘치는 낭만성이 전체적으로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형국이다. 한 마디로 지나치게 넘치거나 모자라는 점이 없어서 그 누구에게나 선뜻 권할 수 있는 음반인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칭찬하자. Hyperion의 녹음 기술은 정말 훌륭한 음질을 일구어내는데 성공했다. 지금까지 들어본 CD 음반들 중에서, 피아노 특유의 은은한 잔향을 이 음반에서처럼 제대로 잡아낸 경우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RCA에서 나온 S.리히터의 유명한 평균율 연주의 단 한가지 결점이 바로 목욕탕에서 피아노를 친 것 같은 웅웅거리는 음질인 것은 잘 알려진 얘기이다. 그래도 울며 겨자먹기로 그 음반을 들어 왔다면, 휴이트의 이 음반에서 제대로 된 피아노의 음색과 표현력을 즐기기 바란다.
정말이지, 메이저 음반사들이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만 해주면 안될까? 가격이 조금, 아니 많이 올라간다고 해도 이 평균율 음반이 보여주고 있는 정도의 짜임새와 완성도만 보장해준다면 앞으로는 아무리 터무니없이 방대한 양적 구성의 초매머드급 재발매 박스물을 내놓는다고 해도 아무 말 하지 않겠다. 제발 좀 이만큼만 해달란 말이지.
ps: 이 음반을 듣고 안젤라 휴이트의 바흐 해석에 감명을 받았다면 그녀의 공식 홈페이지도 꼭 들러보기 바란다. 공연과 녹음으로 점철된 일과를 충실하고도 담담하게 써 나가는 그녀의 성실함과 진솔함에 또 한번 감명을 받게 될 것이다.
Posted by A.J.H

















